공갈 3 - 이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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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화정가라오케 2-1 장 모략"공갈이 불만이 많은 것 같습니다."김석훈이 말했으나 강차만은 쓴웃음만 지었다. 점심 시간이어서 그들은 회사 근처의 식당에 앉아 있었다. "저한테 털어놓지는 않고 있지만 고 과장하고는 자주 만납니다."그러자 강차만이 물컵을 내려놓고 김석훈을 바라보았다. 안경알 속의 눈빛이 날카로왔다."고 과장은 내년에 관리 부서로 옮겨 갈거야. 그건 자네만 알고 있어.""예, 대리님."긴장한 김석훈을 향해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공갈이 불평 불만이 많은 놈이라는 건 나도 이미 알고 있었어. 그리고 야심이 있는 놈이라는 것도.""제가 여로모로 노력을 했습니다만 융화가 잘 안됩니다." "그 놈에게 약점이나 잡히지 말어. 입 조심하란 말이야." "염려하지 마십시오.""제일산업 서 사장이 지난 달에 공갈한테 2백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네려다가 거절당했어. 자넨 그 일을 알고있나?" "모르고 있습니다."김석훈이 머리까지 저었다."금시초문입니다. 대리님.""그 놈이 아마 우리 일을 눈치채고 있을지도 몰라."그러자 김석훈이 머리를 끄덕였다.제일산업은 단파 무전기를 생산하는 회사로 A팀의 지정 공장이다. 공갈이 관리하는 남아프리카의 오더가 제일산업에서 생산되고 있지만 강차만과 김석훈의 오더도 들어가 있는 것이다. 뇌물을 집어 주는 서 사장의 행태를 보고 공갈은 강차만과 김석훈의 비리를 눈치 챘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강차만이 휴지로 꼼꼼하게 입가를 닦았다."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증거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까."그리고 제일산업측에서도 문제가 생겼을 때는 강력하게 그런 사실을 부인할 것이다. 만일 비리가 노출된다면 거래가 끊기면서 고발 조치를 당할테니 함께 자멸하는 것이다.강차만을 따라 식당을 나오면서 김석훈은 심호흡을 했다. 공갈은 입사 동기였지만 같은 팀이 된 순간부터 경쟁자로 바뀌어졌다. 이렇게 치열한 실적 위주의 조직 생활 내에서 그것은 적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적을 넘어 뜨리지 않으면 내가 당한다. 티오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박민혜의 전화가 걸려 왔을 때는 점심을 마친 공갈이 마악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오늘은 내가 한잔 살게요."밝은 목소리로 박민혜는 거침없이 말했다."8시에 논현동의 사파리에서.""정각에 가 뵙지요."분위기에 맞춘 공갈의 목소리도 활기에 찼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논현동의 사파리 클럽은 그가 서너 번 가 본 곳으로, 분위기가 밝은 가라오케 겸용 나이트 클럽이다. 밀실도 10여 개 있어서 은밀한 데이트를 하기에도 적당했다. 퇴근 시간이 되어서 택시를 잡아 탄 공갈은 집으로 전화를 했으나 어머니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어머니는 핸드폰과 호출기도 가지고 있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서로 연락하지 않는 것이 습성화되어서 공갈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화정가라오케 넣었다. 어머니는 제주도에 열흘이나 가 있었고, 돌아온 후에도 사흘 걸러 한 번씩 외박을 했다. 새 남자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남자도 길어야 1년쯤 만나다가 헤어지게 된다.스쳐 지나는 거리를 무심한 시선으로 보면서 공갈은 문득 쓴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의 공허감을 진작부터 이해는 했지만 공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와의 이런 생활은 자신에게 자립심을 키워 주었다.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의 행태를 보아 온 지라 이성의 이용 가치를 일찍 깨닫게 되었으며, 인간은 결국 혼자 남게 된다는 것도 알았다.그리고 주위로부터 고립되지 않으려면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싸움터로 들어섰다고 봐도 되었다.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다. 목숨만 부지해서 그저 먹고 자고 후손이나 생산한다면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다.강차만의 얼굴을 떠올린 공갈은 어금니를 물었다.당면 목표는 팀장인 강차만이다. 입사 동기 김석훈은 진작부터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회사 생활이 지겹다고 생각되지 않어?"술에 취한 박민혜의 눈은 물기에 젖어 번들거렸다. 탁자에 비스듬히 상반신을 기댄 박민혜가 조금 느린 목소리로 물었다."월급쟁이의 목표라는 건 고작 월급쟁이 사장이 최정상이야. 안 그래?""그렇군.""공무원과 마찬가지로 월급만 가지고는 집 사고 아이 가르치기 힘들어. 그렇지?""그건 그래.""우린 종이야. 하인이라고."딸꾹질 때문에 말을 멈춘 박민혜가 이제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사파리의 밀실 안이었다. 옆방에서 음악과 노래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왔지만 방음 장치가 잘 되어 있어서 이쪽은 숨소리도 들린다. 공갈은 한 모금 위스키를 삼켰다. 위스키를 둘이서 세 병째 비우는 중이었으니 박민혜도 한 병은 족히 마셨다. 밤 11시 반이 되어 가고 있었다. 노래방 기계로 한 시간이 넘도록 노래도 부른데다 플로어로 나가 춤까지 추고난 터라 공갈의 몸도 조금 나른해졌다.그가 박민혜를 바라보았다."난 공수 특전단 출신이야. 대학 때 자원해서 입대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빙긋 웃었다."훈련과 군기가 가장 세다고 해서 간거야.그 곳에서 만 3년을 보내고 나니까 내가 땅을 딛고 서 있는 한 무엇이건 견딜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지." "장하네. 남들은 군대 빠지려고 수술까지 한다던데.""난 지지 않을테다.""이겨 봐."박민혜가 빈 잔을 내밀었으므로 그는 술을 채우며 웃었다."내 어머니만 죽으면 25억쯤되는 재산이 내 앞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그걸로 먹고 살 생각은 없어."따라 웃을까 말까 망설이던 표정의 박민혜가 결국 피식 웃었다."그럼 월급쟁이 계속할거야?""내 체질에 맞아. 경쟁이."술잔을 화정가라오케 든 공갈이 박민혜의 잔에 부딪쳤다."밟고 올라서는 이 체제가."눈을 뜬 공갈은 먼저 옆쪽에 누워 있는 박민혜를 보았다. 베개에 얼굴 한쪽을 묻은 채 박민혜는 깊게 잠들어 있었는데, 다리 부분에만 시트가 덮여져 있을 뿐 알몸 이었다. 호텔방 안이었다.어젯밤 사파리에서 호텔의 나이트 클럽으로 옮겼다가 방으로 올라 온 것이다. 스탠드의 전광 시계가 새벽 5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침대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일어난 공갈은 냉장고로 다가가 생수 병을 꺼내 들고는 병째로 벌컥이며 마셨다. 입가로 흘러 떨어진 물줄기가 알몸의 가슴을 적셨다."나두 한잔 줘."기척에 깨었는지 박민혜가 누운 채로 손을 내밀었다. 풍만하게 드러난 젖가슴을 가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공갈이 건네 준 물잔을 갈증난 사람처럼 마시고 난 박민혜가 잔을 내려놓더니 이번에는 두 팔을 벌렸다."해 줘."다가간 공갈이 박민혜의 가슴을 두 손을 움켜 쥐었다. "그럼 이번에는 맨정신으로 해 볼까?"지난 밤에 박민혜는 처음에 거칠게 공갈을 압박했지만 금방 늘어졌다. 그래서 두 번이나 절정을 맞았는데 나중에는 양처럼 온순해졌던 것이다. 공갈은 치밀하게 박민혜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이미 상대방의 체형을 알고있는 터여서 공갈의 혀가 샘을 공략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박민혜는 절정에 이르렀다.비명같은 신음을 뱉으며 박민혜는 공갈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애타게 더 큰 것을 요구했다.땀으로 범벅이된 그들의 몸이 떼어졌을 때는 창밖이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아침 7시였다."나, 좋았어?"박민혜가 허덕이며 묻다 공갈은 풀석 웃었다."알면서 왜 물어?""나만 좋은 것 같아서 그래. 나 꽤 밝히는 여자지?""넌 괜찮은 여자야."둘이는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쾌락 후의 나른한 피로감에 쌓이 그들은 한동안 더운 숨만 뱉았다. 이윽고 공갈이 입을 열었다."일어나자. 출근해야 될 것 아냐?""그래."했지만 박민혜는 여운을 조금 더 즐기고 싶은지 움직이지 않았다.우간다 오더의 생산을 체크하던 공갈은 허리에 찬 호출기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호출기를 빼내 보았을 때 낯선 번호가 찍혀져 있었다. 수원에 있는 군복 공장 안이었다. 사장과 선적일을 상의하던 중이었으므로 10분쯤 지났을 때 다시 호출기가 진동했다.그는 옆에 놓인 전화기를 들고 찍힌 전화 번호를 눌렀다."여보세요."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에서 공갈은 긴장했다. "호출하신 분입니까?""아, 공갈 씨?"목소리가 화악 밝아졌다."저예요, 김영미."김영미에게 호출 번호만 알려주었던 것이다."아, 왠일이요?""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요? 내가 술 살게요.""약속이 있어서 안 되겠는데.""무슨 약속인지 미룰 수 없어요?"김영미의 화정가라오케 목소리에 이제는 짜증기가 섞여져 있었으므로 공갈은 쓴 웃음을 지었다. 김영미는 이제까지 제 뜻대로 안 되는 일이 거의 없었던 환경에서 지내왔다."안돼, 오늘은.""그럼 내일은 어때요?""좋아, 내일 만납시다."더 이상 튕기면 반발할 것이다.회사로 돌아왔을 때 강차만이 다가와 섰다."이 봐, 공갈 씨, 오늘 저녁에 나하고 한잔 할까?"낮게 말한 그가 시선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요즘 바쁠테니 내가 스트레스를 풀어줄게.""고맙습니다, 대리님."강차만이 공갈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좋아, 8시에 화정에서."화정은 회사 근처에 있는 룸 카페인데, 강차만이 접대용으로 애용하는 곳이었다.강차만이 돌아가자 옆 자리의 이선경이 궁금한 듯 힐끗 거렸지만 공갈은 모른 척했다. 저녁 8시가 되었을 때 공갈은 화정의 밀실에서 강차만과 마주 앉았다. 이렇게 둘이서 독대하는 것은 공갈이 입사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 봐, 내가 신입 사원 시절에는 일 주일에 사흘은 집에 들어가지 못했어."공갈의 잔에 양주를 채우면서 강차만이 말했다."지금 3부장이 내 직속 상관 이었는데 부하를 마치 종 부리듯 했지. 우린 그 양반 한마디에 벌벌 떨었어." 공갈의 시선을 잡은 강차만이 빙긋 웃었다."자넬 보면 그때의 내가 생각나. 눈빛에 독기를 품고는 두고 보자면서 이를 갈았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나하고 3부장하고는 절친한 사이지.""저는 독기를 품고 있지 않습니다."공갈이 말하자 강차만이 정색했다."자넨 야심이 있어. 김석훈이 하고는 질이 다르단 말이야. 내가 사람보는 눈은 정확해.""그저 낙오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그러려면 나하고의 협조 체제가 잘 이뤄져야 될 텐데." 술잔을 든 강차만이 가늘게 뜬 눈으로 공갈을 보았다. "그렇지 않은가?""그렇습니다.""회사는 조직체야. 더욱이 영업부의 팀워크는 무엇보다도 중요해."강차만이 술잔을 들고 건배하자는 몸짓을 했다."앞으로 잘 지내자구.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라도 찾아오란 말이야."강차만과 헤어졌을 때는 10시 반이었다.택시 정류장에서 강차만을 배웅한 공갈이 근처의 생맥주집에 들어서자 안쪽에 앉아있던 이선경이 손을 들었다. 맥주집 안은 손님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이 학생 또래의 젊은이였다."지겨워서 혼났어."이미 맥주를 몇 잔 비웠는지 이선경이 흐려진 눈으로 공갈을 보았다."강차만이 뭐라고 그래?""잘 지내자는 거야. 어려울 때 상의하라고.""이상하네."이선경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그렇다고 그 비싼 곳에서 양주를 사?""뒤가 구린 곳이 있기 때문이야."날라져 온 맥주잔을 쥐면서 공갈이 쓴웃음을 지었다. "잘못되면 하루 아침에 목이 날아갈 수가 있으니까." 이선경은 이제까지 팀 내부의 정보를 수집해 주었고 여직원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도 알려 주었다.그 중 요긴한 정보도 많았지만 결정적인 정보에는 화정가라오케 공갈과 마찬가지로 근접할 수 없는 위치였다.그러나 이제 비서실의 박민혜가 있다.박민혜는 다음 달 초부터 사장이 컴퓨터 통신을 통하여 사원들의 건의 사항을 직접 받는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던 것이다. 강차만이 그것을 알고는 불만이 많아 보이는 자신을 먼저 회유하려고 했다.공갈은 벌컥이며 맥주를 삼켰다. 그것을 이선경에게 알려 줄 필요는 없다.이선경이 필요로 한 것은 다만 자신과 함께 이 밤을 지내는 것일 테니 그것만 충족시키면 된다."꽤 괜찮아."김영미가 커피 숍의 입구쪽을 보면서 말했다. 저녁 8시 15분 전이었다."보디 가드로 데리고 다닐만 해.""그런 남자는 얼마든지 있어."매사에 비판적인 윤지영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김영미가 오늘 제일 친한 친구인 윤지영과 함께 나온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제까지 그녀는 한 번도 정식으로 남자 친구를 사귄 적이 없던 것이다. 그래서 스쳐 지나는 남자들을 윤지영에게 소개시켜 준 적도 없다."하긴 고전적 스타일이 감동이 있긴 하지."쥬스를 한 모금 삼킨 윤지영이 짙은 속눈썹 밑으로 김영미를 보았다."산적들에게 잡힌 공주를 말 탄 기사가 구해낸 이야기의 현대판이니까.""이년아, 그만 해.""난 구린내가 난다. 더욱 낡아서."윤지영은 강남에 빌딩을 네 채나 갖고 있는 빌딩 임대업자의 딸이다. 성형 수술로 다듬은 얼굴이어서 눈이 번쩍 뜨일만한 미인이었고 몸매도 쭉 빠졌다. 공갈이 입구로 들어섰으므로 김영미는 손을 들어 보였다. 긴장한 윤지영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장신의 사내를 보았다. 넓은 어깨를 흔들며 거침없이 다가오는 사내의 표정은 차가웠다."어, 일찍 와 있구만."털썩 앞자리에 앉은 공갈이 힐끗 윤지영을 보았다. "친구까지 데리고 왔나?""내 친구에요, 윤지영이.""난 공갈이요."던지듯이 말한 공갈이 김영미에게로 곧장 시선을 주었으므로 윤지영은 화가 났다. 사내에게서 이런 대우를 받기는 처음인 것이다. 김영미는 그런 공갈에게 더욱 끌리는 모양이었다. 공갈이 차를 주문하기도 전에 엉덩이를 들썩였다."우리 한잔 하러 가요."두 여자의 표정을 재빠르게 관찰한 공갈은 상호 간의 경쟁심을 읽을 수 있었다. 김영미는 꽤 까탈스런 상대와 동행해 온 것이다.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친구는 곧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내려 줄 것이었다. 머리를 돌린 공갈이 윤지영을 보았다. "만나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윤지영 씨."클럽 헤라는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어서 공갈은 처음 이었다. 가입비가 수백만 원에 술값이 다른 곳의 두 배쯤 되는 곳이었지만 홀 안은 이미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화정가라오케 김영미와 윤지영이 물론 이곳의 회원이어서 플로어 근처의 예약석으로 안내되었다."이곳, 처음이시죠?"자리에 앉아 뻔히 알고 있을텐데도 윤지영이 짓궂게 물었다. 김영미가 눈짓을 했지만 그녀는 공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이다. 공갈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소문은 들었지요. 물이 좋은 곳이라고.""어때요? 좋은가요? 물이?""내가 보기에는 흙탕물인데."윤지영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김영미는 웃었다.안주와 함께 헤네시 코약을 날라온 종업원이 윤지영에게 귓속말을 했다. 벌써부터 부킹이 들어온 것이다.기분이 나빴던 참이라 벌떡 일어선 윤지영이 종업원을 따라 나갔다."저 괴물은 뭐하러 데려 온거야?"공갈이 거침없이 묻자 김영미가 다시 웃었다."공갈 씨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쟤가 사람보는 눈이 꽤 정확하거든.""불안했던 모양이군.""당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거든요. 이름하고 호출 번호밖에.""난 사업을 해.""어떤 사업인데요?"김영미가 눈을 반짝이며 묻자 공갈이 코냑을 잔에 따랐다."주로 군수품을 수출하지. 아프리카나 중동, 또는 내전이 일어난 나라에."공갈은 김영미의 얼굴이 호기심으로 가득 덮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술잔을 든 그는 한 모금을 삼켰다."그래서 주로 외국에 나가 있어. 전쟁터를 찾아 다니면서 군수품 오더를 받아 온단 말이야.""멋있어요."김영미가 상체를 테이블에 바짝 붙였다."그래서 그런지 당신한테는 거칠고 황량한 분위기가 풍겨와요."윤지영은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곧 플로어로 나갔다. 조명이 번갯불처럼 번쩍이는 플로어에 오르자 김영미는 마치 물에 놓여진 고기처럼 생기를 띠었다. 밤 11시 반이었다.3시 반이 되었을 때 김영미는 소스라쳐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는 공갈을 발견하고는 두 손으로 젓가슴을 가렸다. 그제서야 자신이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인 것을 깨달은 것이다."여, 여기가 어디에요?"그렇게 물었다가 시트로 상반신을 감더니 공갈을 노려보았다."언제 여기 왔어요?""새벽 2시에 들어왔어."자리에서 일어선 공갈이 냉장고를 열고는 생수병을 꺼내었다. 잔에 생수를 따른 그가 다가와 김영미에게 내밀었다."넌 엉망으로 취했어. 네 친구는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고, 술값 계산도 내가 했어.""기억이 안 나요."잔을 받은 김영미가 벌컥이며 물을 들이켰다.공갈이 손끝으로 김영미의 턱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털어 내었다."기억이 안 난다구? 도대체 이런 짓이 몇 번째야, 술 먹고 기억이 안 나는 일이.""처음이야."눈을 치켜뜬 김영미는 공갈의 단정한 차림새를 보았다. 저고리만 벗었을 뿐 넥타이도 그대로 맨 채이다.공갈이 다시 창가의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널 이곳으로 데려와 옷을 벗기고 눕혔어. 곱게 재웠으니 오해하지 말어.""...""이제 술이 조금 깼으면 일어나 옷 입고 집에 가, 어서." 그러자 김영미가 어깨를 늘어뜨렸다."오늘은 지영이집에서 잔다고 했어. 화정가라오케 들어가지 않아도 돼." 자리에서 일어선 공갈이 의자 위에 걸쳐놓은 저고리를 들었다."계산은 했으니까 체크 아웃할 때 미니 바 사용료만 내면 돼."발걸음을 떼었던 공갈이 멈춰서서 김영미를 바라보았다. "물론, 나도 여자와의 기회를 노리는 놈 중의 하나지만 이런 식은 싫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것이고."그러자 굳어졌던 김영미의 얼굴이 펴지면서 얼굴에 웃음기가 피어났다."맞아요, 오빠.""그럼, 잘 자."방을 나온 공갈은 심호흡을 했다.김영미의 코냑잔에 몰래 수면제를 넣었으니, 뻗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아마 김영미로서는 남자하고 둘이 호텔 방에 들어가 그냥 나온 일은 이번이 처음일 터였다.피터슨이 한국에 온 것은 첫 오더를 선적하고 난 지 일 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조선 호텔의 객실에서 만난 피터슨의 표정은 밝았다."미스터 공, 이번에는 빅 오더를 하겠네."마주 앉았을 때 피터슨이 대뜸 말했다."여기 품목 리스트가 있어."그가 탁자 위로 서류를 밀어 놓았다.지난 번과 같이 우간다로 보내는 물품이었지만 수량이 많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재고품이 대부분이다.서류에서 시선을 뗀 공갈이 머리를 끄덕였다."좋습니다. 지난 번처럼 신용장은 홍콩에서 개설하겠지요?" "물론이지. 도착지도 홍콩이야."홍콩에서 다시 우간다로 보내지는 것이다. 회사로 돌아온 공갈은 우선 가격을 산출했다.피터슨의 제시 가격보다 높은 품목도 있었지만, 큰 차이가 없었으므로 절충이 가능할 것이었다.오퍼 시트를 꾸민 공갈이 강차만의 책상으로 다가가 섰다."대리님, 피터슨의 추가 오더는 1백만 불 가량이 될 것 같습니다.""그래?"눈을 크게 뜬 강차만이 오퍼 시트를 펼치더디 곧 활짝 웃었다."공갈 씨가 드디어 한 건 했군, 그래.""가격을 절충해야 될 품목이 몇 건 있습니다.""그건 나하고 같이 피터슨을 만나 결정을 하자구." 강차만은 서둘렀다. 오후의 다른 약속을 모두 미루더니 피터선과의 상담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강차만이 잠깐 사무실을 비웠을 때 이선경이 공갈의 책상으로 다가와 섰다."강대리가 신바람이 났어."목소리를 낮춘 그녀가 말을 이었다."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뙤국놈이 받는다는 말 알지. 그 말 명심해.""시끄러, 이것아.""아마 이번 오더도 지가 땄다고 보고할 걸? 공갈 씨는 조수 역할을 한 것으로 될 거야."쓴 웃음을 지은 공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듣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강 대리는 지금쯤 김 부장을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수고했어."김만채가 웃음띤 얼굴로 강차만을 바라보았다.그는 손에 오퍼 시트를 쥐고 있었는데 공갈이 작성한 피터슨의 오퍼 시트였다."어떻게든 성사시키도록 해.""알겠습니다, 부장님.""가격을 맞춰 주는 한이 있더라도.""예, 부장님."회의실의 문이 열리더니 박민혜가 찻잔을들고 들어섰다. 김만채는 비서실 화정가라오케 옆쪽의 회의실을 자주 이용하는 바람에 비서실 직원들이 차 심부름을 한다. 사장 아들의 특권인 것이어서, 다른 부장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짓이다. 찻잔을 든 김만채가 말을 이었다."신용장 체크는 철저히 해야 될 거야.""담당자에게 철저히 교육시키고 있습니다."김만채가 머리를 끄덕이자 강차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차만이 방을 나갔을 때 머뭇거리면서 서 있던 박민혜가 김만채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저 사람 평이 좋지 않아요.말끝마다 부장님을 팔고 다닌다고 하던데요."눈만 올려뜬 김만채에게 그녀는 말을 이었다."그래서 다른 팀장들은 물론이고 부장들도 저 사람을 꺼린다고 해요.""그래?""내년에 부장님이 중역이 되시면 자기도 과장 진급이 된다고 한데요. 회사에 소문이 쫙 났어요.""경솔한 놈이군."이맛살을 찌푸린 김만채가 입맛을 다셨다."내가 언제 그런 언질을 주었다고.""가깝게 대하지 마세요.""그건 그렇고."김만채의 시선이 부드러워졌다."오늘 밤 어떠냐? 8시에.""좋아요."시선을 받은 박민혜가 눈웃음을 치더니 몸을 돌렸다. 자신의 뒷모습에 김만채의 시선이 닿아 있는 것을 의식한 듯 엉덩이의 움직임이 조금 커졌다.점심 시간에 강차만과 김석훈은 회사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한정식 집에서 식사를 했다. 강차만이 공장 사장들을 만날 때 자주 이용하는 장소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엔 적당한 곳이었다."공갈이 요즘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데요."웃음띤 얼굴로 김석훈이 말했다."재고품 100만 불 물량이니까 공장 사장들한테서 전화가 자주 옵니다."수저를 내려놓은 강차만이 김석훈을 보았다. 차가운 시선이었다."경진하고 우영에 가면 돈을 줄거야. 점심먹고 다녀와." "알겠습니다."정색한 김석훈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물었다."받아다가 어디에 둘까요?""일단은 잠깐 보관시켰다가 퇴근 후에 성원으로 가져와. 8시에 내가 그곳에 가 있을 테니까."성원은 역삼동에 있는 룸 살롱이다. 김석훈이 생기띤 얼굴로 강차만을 보았다."예, 정각에 가겠습니다."하청 공장 경진과 우영으로부터 리베이트를 받는 것이다. 콩고물 정도가 아니라 일부분을 떼어 받는 입장이니,이런 심부름은 신바람이 난다.강차만이 주머니에서 접혀진 서류를 꺼내어김석훈에게 내밀었다."이건 이번에 공갈이 받은 우간다 재고 오더 중에서 경진과 우영의 재고를 가져갈 내역이야. 가격은 옆에 적어 놓았으니까 그대로 공갈한테 밀어 붙이라고 해." "알았습니다. 대리님."두 손으로 서류를 받은 김석훈이 소중한 듯 가슴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공갈에게 미리 가격 정보를 준 것이다. 그리고는 이쪽에서 리베이트를 뗀다.공갈이 예상보다 높은 가격에 황당해 하겠지만 강차만은 모른 척 경진과 우영의 제시 가격을 승인해 줄 것이었다. 안전한 방법이었으므로 김석훈은 강차만의 치밀함에 감탄했다. 공갈은 열심히 재주를 부리는 곰이었고 이쪽은 앉아서 돈이나 챙기는 중국 상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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